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마무드 아마디네자드 (문단 편집) == 상세 == 이란 내에서 대표적인 보수강경파 인물로 알려진 인물로서 1979년 [[이란 혁명]]때 미국 대사관 점거계획에 참여하면서 꽤나 이름을 날렸고 이후로 [[특수부대]] 사령관으로 일하기도 했다. [[1990년대]]에 아르데빌 시장을 역임하다가, [[2003년]]에 [[테헤란]] 시장에 당선되면서 유능한 시장이라는 평판을 얻었고 임기도중에 시장직을 사퇴하고 대통령 선거에 나섰다. 위험한 모험이라는 평가를 받았지만 [[2005년]] 8월 3일 대통령 선거에서 예상을 뒤엎고 결선에 진출, 개혁파와 온건보수파가 지지한 후보인 라프산자니 후보와 맞붙어 예측을 완전히 뒤엎고 당선되었다. 이것이 이변이라고 표현될 정도인건 우선 당초 1차 투표에서 개혁파와 온건보수파 후보를 합해서 60%에 달하는 득표율을 기록했기 때문이었다. 두번째로는 마무드 아마디네자드의 성향이 극우파라서 중도층의 표를 얻기 힘들것이라는 예상때문이었다(...) 그렇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란의 [[직선제]] 대통령 가운데서는 처음으로 비성직자 출신인 대통령이다. 사실 당대에는 강경파라는 이미지도 있고 테헤란 시장에 재직했을 때 강경보수적인 행보를 보였던걸로 인해서 우려가 많았다. 하지만 테헤란 시장 때 그런대로 일 잘하고 청빈한 [[정치인]]으로 알려져서 괜찮은 [[이미지]]를 쌓은 덕에 당시 이란 경제 전반적인 문제점인 실업문제와 빈곤문제 해결 등 경제이슈를 들고나오면서 강경파적인 이미지를 불식시키고 농촌지역 주민들과 빈민층의 지지를 얻어 당선되었다. 물론 이는 부분적으로는 하메네이와 상당히 친했기 때문에 개혁파 후보라면 져야 할 장애물이 그에게 적용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어쨌거나 단순히 강경파라서 당선된것은 아니라는것은 사실이다. 초기 몇년간은 [[유가]]가 급상승하면서 나름대로 [[호황]]을 경험했고 보조금도 풀어 빈민층들의 지지도 괜찮게 나와 제법 승승장구하는 듯 싶었다. 그러나 2008년 금융위기의 여파로 점차 지지세가 수그러들었고, 개혁정책의 후퇴와 언론자유 제한 등의 보수적인 통제정책의 강화로 젊은층들로부터 많은 반감을 샀다.[* 단순히 언론자유를 제한시킨 수준을 넘어서 [[인터넷]] 속도도 128kbps로 제한시켰다. 한국 기준으로 친다면 ADSL 이전의 인터넷 속도를 체감할수 있었다는 얘기다. 그래서 [[하산 로하니]]가 집권하기 이전에 이란의 인터넷은 속도가 느려터지기로 악명높았다.] 이 와중에 [[2009년]] 6월에 대통령 선거에서 전 [[총리]]였던 미르 호세인 무사비 후보를 누르고 당선되어 재선했다. 하지만 당시 [[부정선거]] 의혹이 크게 일어나[* 사실 아무리 농촌지역에서의 지지율이 높다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당시 젊은 층들의 불만이 상당했던데다가 득표율이 예측치보다 너무 높게 나왔고, 그래서 대충 하미네이하고 적당히 쇼부봐서 조작한 것이라는 얘기가 많았다.] 대규모 시위가 벌어지기도 했다. 당시 이란의 학생 한명이 시위 도중에 경찰의 총에 맞아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 학생의 이름은 네다 솔탄으로 후에 그녀는 [[이란]] 민주주의의 상징이 되었다. 그런데 언론들이 그녀의 생전 사진이랍시고 엉뚱한 사람의 사진을 올리는 사태가 벌어졌다(나중에 네다 솔탄의 유족들이 그녀의 진짜 생전 사진을 보여주고 [[BBC]]를 비롯한 일부 언론들이 정정보도까지 했지만 소용없었다.). 이 사람은 당시 34살의 영어 강사였던 자라 솔타니였는데 우연히 그녀의 사진을 본 이란 정보국은 그녀를 이용해 '네다 솔탄은 살아있으며 그녀의 죽음은 반정부 세력과 서방 측이 조작한 프로파간다였다.'라는 식으로 시민들을 속이려고 했다.하지만 자라 솔타니가 이를 거절하자 이란 정보국은 [[적반하장|오히려 그녀를 CIA의 스파이로 몰아 기소했고]] 결국 그녀는 비행기를 타고 [[터키]]를 거쳐 [[미국]]으로 망명해야 했다(스파이 혐의로 기소된 탓에 출국 금지까지 당했지만 공항 직원을 돈으로 매수하는 기지를 발휘해 간신히 망명에 성공한다.).이후 그녀는 지금까지도 미국에서 살고 있다.]이 때문에 시위의 규모는 더욱 확산... 그러나 2010년대에 유가가 회복되는 시기에 알리 하미네이와 관계가 틀어졌고 결국 [[2012년]] 총선에서 아마디네자드 세력은 하메네이 지지 세력에 크게 밀렸으며 이어서 서방의 경제재제로 인해 이란 경제가 악화되면서 정부 보조금을 대폭 삭감해야했다. 이로 인해 물가가 크게 오르고 생계형 범죄와 실업이 급증하는 등 도시 시민들의 불만을 사게 되었고 시골에서의 지지율조차 급감해버렸다. 결국 온건한 하산 로하니가 과반득표로 집권하는것을 지켜보며 쓸쓸히 은퇴해야 했다. 여하간 [[반미]]주의자, [[반이스라엘]] 주의자로 물의를 빚은 인물이기도 하며, 집권시에는 핵개발권리는 이란의 [[주권]]이라면서 [[미국]], [[이스라엘]]과 잦은 대립과 마찰을 겪었다. 국내적으로도 [[언론]]과 사회통제로 개혁파와 잦은 마찰을 빚었다. 서방세계에서 [[로버트 무가베]], [[김정일]]과 더불어 최악의 [[독재]]자 중 한명으로 손꼽힌다. 근데 단 무가베나 김정일은 막장완벽 [[독재자]]이지만, 아마디자네드는 사정이 많이 다르다. [[이란]] 이슬람공화국의 대통령은 [[직선제]] 선출직이지만, 그 위에 실권자인 이맘(imam) [[호메이니]]의 후계자인 [[알리 하메네이]](카메네이)가 떡 버티고 있다. 아마디네자드는 하메네이 꼭두각시인 셈(…). 사실 아미디네자드가 이렇게 깽판을 치는 것은 일부러 이란의 최고 수뇌부인 [[라흐바르|종교 지도자]]에 대한 [[비판]]을 자신이 일부러 맞으려는 몸부림이라는 설이 있다. 한마디로 의도적인 광역 어그로를 끌고 있다는 설이 지배적이다. 자신이 실제로는 종교 지도자의 순한 양이라는 것을 인지시키면 자연스럽게 [[국민]]들이 이란의 종교지도자들을 [[비판]]하겠지만 만약에 자신이 국제적으로 민폐도 끼치고 깽판을 부리면서 마치 자신이 이란의 지도자인양 행세하면 국민들은 아마디네자드를 욕하는 선에서 끝나며 이때쯤 하메네이가 아마디네자드에게 자제하라는 소리 한번 정도 해주면 국민들은 오오 하메네이 오오... 이러고 종교지도자들의 [[권력]]은 더욱 확고해진다. 물론 1기 집권때는 가능성이 적은게 아무리 그렇다해도 이란이 대통령과 국회의원을 [[선거]]로 뽑는 국가인 만큼 나름대로 인기관리를 해야하는 처지인데다가, 시골에서는 나름대로 지지기반이 있었에 집권한 것이지 단순히 하메네이하고 친해서 집권한 건 아니다. 물론 2기 집권 때는 얄짤없지만 하메네이가 2013년에 치러진 대선에서 마무드 아마네자드의 편이였던 사람들을 갈아치우며 결국은 사실상 정치적인 힘을 잃어버린 상황이다. 결국 반대파인 [[하산 로하니]]가 하메네이의 낙점을 받아 신임 대통령으로 취임했고, 그 후 아마디네자드는 정치가로서의 생명이 끝장나버린 상태다. 2018년에 [[2017-2018 이란 시위|시위]]를 선동한 혐의로 체포되어 가택연금되었다는 보도가 나왔다. [[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8/08/13/0200000000AKR20180813067200009.HTML?input=1195m|#]]그런데 미국 [[트럼프]] 행정부의 이란 핵협정 파기를 계기로 정치적인 재기를 노리고 있다는 분석도 나왔다. 실제로 여론조사에서 1위를 기록한 것도 있고. 이를 노려 대통령직 복귀를 시도했지만, 선관위의 '''퇴짜'''를 맞으면서 정치적 재기도 실패했다. 그나마 같은 보수파인 후배 정치인 [[에브라힘 라이시]]가 선거에서 압승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